원주시민은 시 승격 70주년을 경축하는 각종 행사와 관련된 소식을 다수 접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시 승격의 경과와 의의를 진지하게 되돌아보는 일은 정작 찾을 수 없었다는 것은 주객이 전도된 모양새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한정된 지면을 통해서라도 그 역사를 알리고자 한다.
시 승격에서 법적인 요건은 인구였다. 지방자치법 제5조는 “시는 인구 5만 이상”이라고 규정하였다. 전쟁 이전 원주읍의 인구는 외부 전입 인구를 합하여도 4만 명을 넘지 않았다. 그러나 전쟁으로 피난민이 대거 유입되었고, 1952년에는 인구가 6만 6천여 명에 달하였어도, 모든 피난민이 원주에 정착하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결국 1955년 원주군의 판부면 단구리와 행구리, 호저면 우산리를 원주읍에 편입하는 방식으로 가호와 인구를 10,833호 56,598명으로 늘리고, ‘영주 가능’ 피난민 1,205호 5,904명을 더하여 인구 조건을 충족하였다. 하지만 인구와 재정 등을 넘겨주게 된 원주군(원성군으로 개칭하게 됨)과 해당 면에서는 불만이 크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방법은 당시 강릉 등지에서도 활용되었다.
현대도시다운 도시가 되기 위해서는 시가지와 건물이 웬만큼 갖춰져야 하였으나, 시가지의 70~90%가 파괴된 원주로서는 이런 도시의 인상을 만들기는 역부족이었다. 그러나 전쟁으로 강원도청 등 행정기관이 원주에 이전하였고, 유엔군민사원조사령부 강원도 본부가 설치되면서 도시 재건 속도가 빨라졌다. 도시계획을 수립하고 사업 착수를 서둘렀다. 인구증가와 전재복구로 원주읍은 이미 읍 단위 행정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규모로 성장했다. 그러므로 지역주민은 시 승격 추진위원회를 구성하였고, 이런 상황을 발전의 호기로 삼아서 ‘대원주시’를 건설하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는 한편 정부에 시 승격과 지역 발전의 당위성을 적극적으로 전달했다.
그러나 시 승격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1952년 중반부터 원주읍 행정기관과 주민이 승격 준비를 하였고, 내무부가 현지 지원도 하였으나, 승격안은 국회에 상정되지도 못하였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승격을 착실하게 준비하였다. 그러면서 원주는 1950년대 중반 인구와 행정 수요, 경제적 기반에서 기준을 충족했을 뿐 아니라, 교통과 군사적 요충지라는 전략적 가치까지 갖춘 ‘신흥도시’로 발전해 나갔다.
이 시기 정부는 지방행정체계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여러 읍들을 시로 승격시키고자 하였다. 여기에는 집권연장을 기도하던 자유당 정권의 정치적 계산도 깔려있었다. 내무부는 시 승격을 희망하는 지방 도시를 여러 모로 지원하였다. 특히 이전과는 달리 국회에서 승격 후보 도시 중 대표 격인 제주만을 심의하도록 하는 전략은 대단히 효과적이었다.
그리하여 1955년 7월 27일 국회 본회의는 원주 등 6개 읍의 시 승격안을 의결하였다. 8월 13일 법률 제372호 <원주시설치에 관한 법률>로 제정되고, 9월 1일부터 시행됨으로써 원주는 시가 되었다. 이는 단순한 행정체계의 변경이 아니라, 도약과 발전을 염원하는 지역주민이 사회경제적 변화를 기회로 삼고 정부의 지방행정 합리화 정책에 부응하여 성취해낸 역사적 거사였다. 이런 역량은 지역사회에서 풀뿌리 민주주의가 성장해갈 동력이었다. 또한 원주가 원주군에 부속된 읍에서 벗어나 중부 내륙과 강원도의 중추도시로 발전해 나갔던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 무엇보다 읍이 아니라 시라는 도시의 격은 지역주민에게 새로운 정체성과 자긍심을 심어주었다. 나아가 원주시가 2000년대에 들어서 혁신도시와 기업도시를 유치함으로써 도약하였던 것도 시 승격의 역사와 연결되었다. 그리고 장래 도시의 발전과 주민의 삶도 그러하리라고 믿는다.
